커스터와 워시타 학살: 왜곡된 역사 아래 숨겨진 진실

어둠을 헤치고 찾아간 마을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이름만 들어도 미국 역사 속 한 장면이 펼쳐지는 인물이다. 그의 저서 "My Life on the Plains"에서는 1867년부터 1874년까지의 서부 생활과 인디언과의 교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1868년 11월 27일의 워시타 전투 이야기는 꼭 집고 넘어가야 한다. 커스터는 자신이 '전투'를 벌였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날 아침 그가 행한 행위는 '학살'에 불과했다. 커스터는 원래 평화를 원하던 블랙 케틀의 마을을 급습했고, 그곳에서 대부분 여성, 아이들, 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전혀 전투라 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1803년경 태어난 블랙 케틀은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1851년부터 1867년까지 미국 정부가 제시한 모든 평화 조약에 서명했으며, 전쟁을 피하려 힘썼다. 하지만 커스터는 그의 마을을 '적대적인' 마을로 단정 지었고, 전쟁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무모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커스터의 자기 변호와 왜곡된 역사의 그림자

커스터의 초기 보고에는 103명의 전사를 죽였다고 주장했으나, 나중에 발견된 시신들은 주로 전사들이 아닌 마을 주민들이었다. 그의 책에서는 두 군이 대등하게 싸운 전투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전사는 사냥이나 다른 마을에 방문 중이었고, 마을엔 지킬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전투'라고 할 수 있을까? 이미 학력 있는 사람들이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는 '워시타 학살'로 불린다.

당시 커스터의 용맹함은 치켜세워졌고, 이는 그가 사망한 후 전설적인 지위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그가 행한 일에 대한 많은 의구심과 비판이 묻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왜곡된 해석은 도전을 받았고, 워시타 사건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전쟁의 잔혹함과 그에 대한 고찰

커스터가 이끈 공격의 참상은 가히 충격적이다. 커스터의 군대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마을을 점령했지만, 이들의 승리는 비어 있는 것이었다. 그의 명령 하에 많은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는 싸움이 아닌 처형에 가까웠다. 충격적인 것은, 커스터가 이 일을 '전쟁에서의 정당한 행위'로 미화하며 그의 보고서에 담았다는 것이다.

또한 커스터의 부대가 잡아온 원주민 여성과 어린이들은, '전쟁 포로'로 처리되었다. 그들은 마치 군사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억류된 듯이 묘사되었지만, 그들은 단지 생존을 원했던 사람들이었다. 이후 역사학자와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정면으로 재조명했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이 사건은 커스터에 대한 평가를 크게 달리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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