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제퍼슨: 혁명적 사상가의 복잡한 유산

토마스 제퍼슨의 초기 생애

토마스 제퍼슨은 1743년 4월 13일 버지니아주의 샤드웰 플랜테이션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인 피터 제퍼슨과 제인 랜돌프 제퍼슨의 세 번째 자녀이다. 그는 10명의 형제자매 중 셋째였으며, 아버지의 부고 후 14세에 5,000에이커의 땅과 60명의 노예를 유산으로 받았다. 제퍼슨의 젊은 시절은 상당히 자유롭고 호화로운 생활을 보내며 시작되었다. 윌리엄 & 메리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파티와 옷, 말들에 막대한 돈을 쏟았다. 자신이 나서서 배웠던 "화려한 생활 방식"에 대해서는 이후에 후회하게 된다.

대학에서의 두 번째 해에는 학업에 깊이 몰두하기로 결심하고, 하루에 15시간씩 공부했다. 이 결심 덕에 그는 수학 교수인 윌리엄 스몰의 제자가 되었고, 이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재산 상속과 교육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퍼슨은 백인 엘리트의 특권을 향유했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 여유로운 가정과 뛰어난 멘토의 지도를 받았으나 노예제를 용인하고 별다른 개선 의지 없이 살아간 것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독립 선언서와 그의 위선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서의 주 저자로 유명하다. 1776년 6월, 그는 존 애덤스, 벤자민 프랭클린, 로버트 리빙스턴, 로저 셔먼과 함께 독립 선언서를 초안했다. 이 문서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를 가졌다고 선언하며 명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런 선언을 작성한 제퍼슨 자신이 평생 노예를 소유했다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다. 그가 지적한 "천부적 권리"는 노예들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제퍼슨이 소유한 약 600명의 노예 중 다수가 그의 영지에서 태어났으며, 노동력의 대부분은 이들에게 의존했다. 이와 같은 행동은 독립 선언서의 정신과 완전히 상충되는 것이다. 제퍼슨은 이러한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았는지 의문스럽다. 그는 글로는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실상은 노예제를 계속 유지하며 사적 이익을 우선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치적 업적과 모순

제퍼슨은 1801년부터 1809년까지 미국의 세 번째 대통령으로 재임했고, 그 기간 동안 루이지애나 매입과 같은 주요 정책을 추진했다. 이로써 미국은 대륙으로의 확장을 이어갔고, 이는 그의 정치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외교적 정책에서도 모순이 드러난다. 그는 중립주의를 표방했으나,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영국과 가까워져야했다고 한다. 각국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잡는 데 부족했고, 이는 이후 전쟁의 여지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그는 쟁쟁한 라이벌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갈등에서도 자신만의 정치적 색깔을 확립하는 데 실패했다. 해밀턴과의 이념적 대립은 각기 다른 정치적 철학을 부각시키기는 했으나, 결국 두 지도자의 견해 차이는 당분간 미국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제퍼슨의 정치적 유산은 그의 업적과 그의 개인적 모순 모두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가 남긴 공적은 분명히 크지만, 그의 모순도 역시 뚜렷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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